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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조국과 파묘 [진옥섭 풍류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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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영화 ‘파묘’. 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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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담, 사일은 서울에서 삼일은 담양에서 지낸다. 운치 있게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노라”지만, 꽉 찬 대나무에 죽을 맛이다. 빈집 마당에 해마다 솟은 우후죽순이 밀림이 되었다. 울울창창한지라, 내 톱과 낫이 무디고 더디다. 게다가 때마침 불어닥친 두 신바람에 마음을 빼앗겨야 했다.



창당한 지 며칠 만에 조국 대표가 파죽지세로 풍운을 열었다. 선거법을 몰라 그가 마이크를 쓸 수 없는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굿판은 아는지라, 찌릿찌릿한 대갈일성에 ‘신 내렸구나!’ 생각했다. 영화 ‘파묘’는 개봉한 지 3일 만에 100만, 4일 만에 200만, 역시 파죽지세로 박스오피스 1위를 달렸다. 무당이 나오니 무관심할 순 없었다. 결국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제대로 걸려 나의 파죽(破竹)은 뒷전이 되었다.



조국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 총을 겨누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같다. 처참한 구덩이를 나와 첩첩의 분노를 여과한 미소에 ‘신기운’이 돈다. 원래 신은 지지리 못 배운 자에게 내리는데, 엔간하면 대졸인 세상이라 아예 고학력도 문제 삼지 않는 모양이다. 굿판에서는 최영이나 임경업처럼 억울하게 죽은 역사 인물이 신으로 모셔진다. 유사 이래로 탈탈 털린 남자가 성급히 신으로 좌정할 수는 없고, 마이크도 들지 못한 채 광장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다. 상상이 이럴 즈음에 조국 대표의 ‘무속인 전화 사절’ 발언이 나왔다. 제정일치 시대로의 회귀 근절, 확실히 굿을 살리는 일이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오방낭(五方囊)이 나라를 흔들었다. 굿은 죄를 지은 양 고개 숙였다. 이에 반격을 가한 것이 2019년 미스트롯의 송가인이었다. 결승전 2라운드에서 ‘단장의 미아리 고개’ 2절, “아빠를 기다리다 어린것은 잠이 들고”를 부를 때, 화면에 잡힌 어머니 송순단이 눈물을 닦았다. 굿판에 간 자신을 기다리던 어린 딸을 생각했을 터이다. 딸의 서슬 푸른 노래가 판을 막았고, 한 달 뒤 덕수궁에서 열린 송순단의 씻김굿에 관객이 인산인해였다. 다행히 그렇게 굿이 체면을 차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2021년 윤석열 후보가 손바닥에 왕(王) 자를 그렸다. 또다시 굿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선 후에도 막후 실세의 배후 무속인이 회자되고 있다. 이때 ‘파묘’의 김고은이 파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감독님! 뉘신지 모르지만 고맙소’ 하고 대나무를 베었다. 그런데 ‘좌파 영화’라는 말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좌파와 굿은 조합이 맞지 않았다. 연장을 놓고 시동을 걸 때쯤, 또다시 엉뚱한 생각이 도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대학생들이 4·4조의 네 음절 구호에 ‘처단하라’를 외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서 누군가 선창을 했다. “노태우를 점지하신 삼신할미 처단하라!” 신통한 구호에 지나던 시민들도 폭소를 터트렸다. 혹시, 그때 삼신할미가 처단되어서 이 나라 합계출산율이 0.65로 줄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국가의 자살이라는 인구절벽도 분명 좌파의 소행인 것이다.



‘파묘’의 초입에 최민식이 유골의 틀니를 찾으니, 어린 손자가 할머니를 간직하고 싶어 챙겼다고 했다. 순간 다짜고짜 눈물이 맺혔다. 나도 할머니의 비녀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화의 말미에 김고은의 뒤에 할머니가 나타날 때, 마침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 역시 파죽하는 고향집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먼저 와 기다리셨다.



“저 바다가 얼면 건너갈 텐데.” 징용 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푸념이 또다시 들려왔다. 사망통지서를 받고 제사를 지내면서도 기다리는 할머니의 넋두리는 노래가 되었다. 할머니 따라 논에 갔다 오면 버릇처럼 당산나무에서 멈춰 서야 했다. 부잣집 전축에서 나는 ‘육자배기’ 때문이었다. 치마폭을 찢어지게 당겨도 긴 노래가 끝나야 발을 떼었다. 오장육부의 밑바닥에서 나오던 그 기나긴 노래가 내 풍류의 바탕이 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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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 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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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샅샅이 살펴도 좌파 영화의 단서가 없었다. 관객들만 우하니 몰렸다가 좌하니 빠져나갔다. 화면 속은 그저 명배우의 향연이었다. 유해진의 시시때때로 넉살, 최민식은 흙 한번 찍어 맛보는 순간부터 여지없이 풍수사다. 그리고 무당, 일단 아득한 눈빛으로 화면을 적셔버린다. 김고은은 굿을 배운 게 아니라 흡수한 듯하다. 관객들 눈에는 신들린 무당 같고, 무당들 눈에는 제 밥줄 뺏을 여자다.



장재현 감독, 굿판, 상가, 장지에서 풍찬노숙을 하였다. 발품과 노동으로 포착한 인간 군상의 에피소드를 예리하게 오려냈다. 그리고 그 각양각색을 정전기가 일 때까지 문질러 딱 붙였다. 이렇게 ‘파묘’의 성공은 치밀한 모자이크이다. 관객의 관심을 끈 대살굿만 봐도 그렇다. 누가 봐도 삼지창에 돼지를 세우는 황해도의 타살굿이다. 그런데 장단이나 몸짓이 서울굿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추측하건대, 감독이 의도한 뒤섞음이다. 아니면, 강원도굿을 하는 고춘자 만신(무당)이 서울 인근의 굿당을 오가면서 자연스레 습합(習合)한 것일 수도 있다. 황해도굿의 강렬함과 서울굿의 우아함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굿을 지도하였고, 돼지를 다섯 마리로 늘리는 등 시각적 확대를 꾀했을 수도 있다. 어쩌든 간에 감독의 교묘한 손질로 화면에 찰지게 들러붙었다.



마침내 무당이 종횡으로 활약하는 영화가 천만을 넘겼다. 그리고 동남아를 넘어 세계의 부름을 받고 있다. 저네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의 퇴마사를 보다 한땀 한땀 이은 조각보로 감싼 우리네 무당을 볼 것이다. 그 치밀한 모자이크의 변주가 세계를 휘어잡을 것이다. 비선 무속인이 운운 되는 때, 실로 혁혁한 무공(巫功)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사에도 고민이 생겨난다. 굿에 대한 관심이 예언이나 비책 등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무당이란 신이 강하면 맞힐 수도 있고, 신이 약해지면 틀릴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안달복달하면 보이스피싱처럼 걸려들 수도 있다. 일반인이건 기성 종교인이건 누구나 미래는 궁금하고, 더 나은 미래가 필요하다. 그래서 무당이 유튜브에 광고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들여다보면 너도나도 족집게 무당이요, 만사형통을 장담한다. 그리고 영상효과로 양념을 친 자신의 굿을 내보내고 있다.



각설하고, 그러면 과연 누구의 굿을 들여다봐야 할까? 정답은, 그래서 국가의 문화재 정책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굿을 우선 먼저 검색해 보시라. 김연아 선수를 보면 피겨를 몰랐어도 금방 기준이 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평생 굿을 연구한 학자들의 검증에 검증을 거친 굿들이 지정되어 있다. 황해도굿의 김금화와 이선비, 서울굿의 김유감. 모두 작고하였지만 유튜브 속에선 건재하다. 가무악(歌舞樂)이 한 몸에서 발효되어 저절로 “얼씨구!”란 기포를 터트리며 익어버린 소리를 낼 것이다. 그분들이 큰무당이고, 그분들의 의례가 굿이다. 그냥 굿이 아닌 베리 굿!



그럭저럭 마당의 대나무도 베고 옛집도 내 한 몸 누울 만큼 고쳤다. 조부모의 흑백 기념사진을 걸었고, ‘육자배기’를 틀었다. “꿈아 꿈아 무정한 꿈아… 언제나 알뜰한 님을 만나서 이별 없이도 살거나 헤~” 할아버지가 간 남양군도가 필리핀 근처라 생각했다. 국가기록원의 기록을 찾아보니 마셜군도의 밀리환초(밀레환초)였다. 적도 근처라 빙하기가 다시 와도 얼지 않을 바다다.



진홍남은 1945년 4월에 전사하였고, 1959년 7월에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 파묘가 영화 속만의 일이 아니다. 기어이 조국에 모셔 와, 기다리고 기다리다 1984년 3월에 죽은 김순례 옆에 묻어야 한다. 야스쿠니신사에서 에이(A)급 전범과 합사된 조선인은 2만1181명이다. 회향우서(回鄕偶書), 고향에 돌아와 우연히 글을 쓰다가 ‘조국’(祖國)과 ‘파묘’(破墓)에 맹세의 방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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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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